중요한 영화들은 언제나 과감하게 스포일링.
우선 영화 자체부터 말해보자. 분명하게 영화 자체만 놓고 보자면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상당히 재미있다. 동네 형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군시절 무용담을 내가 입대하고서야 비로소 몸소 체험하듯이, 익히 상상해오던 미래전쟁의 한 부분을 따라가는 동안 정신없는 로봇쇼가 지루하도록 가만 두질 않는다. 특히 '하베스트'의 습격 장면과 '모토 터미네이터'의 추격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영화의 질감은 코믹 SF진상물인 3편이 내뱉었던 토사물의 더러운 기억을 말끔히 씻을 정도로 진지하고 거칠다. 더운 날씨 블록버스터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야 했다. 그냥 일반 로봇 영화가 아니라 바로 그 '터미네이터' 시리즈이기 때문에 가졌어야 할 덕목들을 모두 포기한채 영화는 그냥 달리고 있다.
터미네이터 1편과 2편이 전설적인 영화로 남은 것은 화려한 액션이나 획기적인 특수효과 때문만이 분명 아니었을 거다. 정해진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주인공들의 절박하지만 강인한 감정들과 근성들, 그리고 기계와 인간의 추격과 싸움 안에서 줄줄 흐르는 긴장과 공포, 그것들 아니었을까. 그게 보는 사람 마저도 막 긴장하고 땀나게 만드는 그런 게 있었단 말이다.
미묘하다고 한 결정적인 이유를 크게 나눠 세 가지로 요약해 보기로 한다.
1.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란 그저 덥고 피곤하고 힘들다, 정도 뿐이다.
주인공인 존 코너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구원자적 리더라기 보다는 그저 '그렇게 될 운명이니까'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처럼 무심하고 무성의해 보이며 존을 따르는 무리들은 영화 1편과 2편을 충실히 챙겨보고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인냥 맹목적으로 존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일 뿐이다. 마치 체스 말처럼. 존이 왜 저들의 리더이며 저들은 왜 존을 따르는지, 관객은 아직 인정하지 못했는데 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있는 꼴이다. 존의 방송을 들은 저항군 분대들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목이 참 중요한 부분같은데 전혀 뭔가가 느껴지질 않는다.
존의 감정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영화 안에서 감정을 조율할 몇 가지 장치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카일과 존의 첫 대면이 그렇게 싱거워서야 되겠는가. 새로 개발된 T-800, 그 중에서도 슈왈제네거의 모양을 한 101모델 중 작동을 개시한 첫 개체의 공격을 받는 존이 아무 감정도 나타내지 않으면 되겠느냔 말이다.
2. 터미네이터의 목적이 '터미네이션Termination'이 아닌 것 같다.
그 많은 기계들이 나오는 데도 전편들에 나왔던 한 두 대의 기계보다 위협적이지가 않다. 물론 거의 민간인에 가까웠던 목표물 대신 정규 군사의 모습을 갖춘 저항군이 본격적으로 대항하고 있으니만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단지 아군의 전력이 강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존 코너에 대한 스카이넷의 무서운 집착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전작들을 관통하는 느낌, 심지어 망할놈의 3편에서도 잊지 않았던, 질려버릴 정도로 코너 모자를 집요하게 쫓는 기계와의 추격전이 주는 스릴이 쏙 빠졌다. 새로운 미래 3부작은 아얘 장르 자체가 다른 것 같으니 어느정도 타협하고 포기한다 치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 3부작의 첫 영화 답게 기계와 인간 저항군들간의 전투에 포커스를 맞췄었으면 좋았을 거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전투신은 하나도 없다. 예고편으로 봤던,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하베스트'의 습격이나 '모토 터미네이터'의 질주 액션, 그것들 빼면 딱히 스케일을 논할 만한 장면이 없어보인다. 제대로 대형을 갖춘 저항군과 기계 부대의 전면전을 딱 한 번만 보여줬어도 좋았을 거다. 2편의 회상신으로 인해 기대했던 그런 '전쟁'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찾기 힘들다.
3. 영화 안에서 가장 멋있는, 존 코너 보다도 존재감이 큰 마커스라는 인물도 어딘가 허전하다.
이 영화에서 마커스의 역할은 이전 시리즈들에서 카일과 T-800, T-850이 각각 맡았던 역할과 비슷하다. 그 마커스와 존의 관계 역시 밍숭맹숭하게 처리되어 버렸다. 존을 구하기 위해 T-800과 싸우고 심지어 존에게 심장 마저 내어주는 마커스의 행동에 어떠한 감정적 설득력을 부여하지 못한 것이 이 영화의 실수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이 몹시 섬뜩하다. 기계로 개조되었건 어쨌건 마커스는 심장으로 움직이는 '생명체' 아닌가. T-800처럼 기계를 베이스로 해서 인간처럼 꾸며놓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성과 생체 조직을 유지한채 기계로 강화시킨 사이보그인데. 자기 심장을 내놓겠다는 마커스의 제안에 그 누구도 반대는 커녕, 놀라지도 않은 채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수긍하는 분위기다. 이 역시 그저 '운명에 끌려다니는 인형들'과 같은 꼴이다. 그렇게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인간성을 가진 개조인간의 심장을 낼름 받아먹다니.
그리고 이 영화는 중요한 하나의 실수를 저지른다. 영화 속 존의 말처럼 사라는 존에게 '심장을 가진 기계'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1편의 카일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그렇다면 영화 안에서 마커스와 카일이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최소한 마커스의 정체를 카일이 계속 몰랐던가.
스카이넷이 카일을 주요 타겟으로 설정한 것도 의아하지만 그건 더 얘기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영화의 장르가 전작들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시간여행 물이었을 때, 미래 핵전쟁 이후의 이야기는 그저 '설정'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벌어지는 슈왈제네거의 로봇쇼 때문에 신경 쓸 틈도 없고 필요도 없는, 그저 '설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핵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게 되면 그건 '설정' 아니라 '지금 하고있는 이야기'가 된다. 관객은 그저 그런 배경이 있구나~가 아니라 이제 이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여기저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나사 빠진 부분들을 채웠어야 하는 거다. 설정의 빈틈 말이다.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은 '시퀄인 척 하는 프리퀄'이라고 한다. 3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사실 1편으로 연결되는 앞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인데, 내가 보기엔 시퀄 흉내도 못내는 '그냥 프리퀄'이다. 시퀄이라면 3편의 핵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쪽이 맞다고본다. 리더가 된 존 코너의 이야기 말고 리더가 되려고 하는 존 코너의 이야기 말이다. 저항군이 어떻게 편성되었고 세계의 도시들은 어떻게 점차 무너져갔으며 3편에 나왔던 터미네이터 초기 기종들이 어떤 모습으로 조금씩 개량되어서 T-600까지 이르렀는지의 모습 말이다.
개인적으로 상상해보자면, 미래의 이야기들을 모두 알고있다고는 하나 사회적으로는 그저 민간인일 뿐인 존 코너가 저항군의 중심 인물이 되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에 '실버맨 박사'의 증언이 뒷받침 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p.s 1- '살베이션' 보다는 '카일 원정대'라는 부제가 더 어울린다.
p.s 2- 전통적으로 터미네이터의 대사였던 'I'll be back'은 마커스에게 넘겨줬어야 했다.
p.s 3-CG로 만들어진 슈왈제네거는 예상보다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조금 오래 나왔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p.s 4- R2D2 흉내마저 내는 마커스는 꽤 진보한 기종이던가 특별히 한 개체만 생산(?)한 한정판인가본데, 기종명은 뭘지 궁금해진다. 분명 T시리즈 처럼 암살이나 전투용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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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아 주세요
맞아요. 이건 그냥 액션영화가 아니라 터미네이터죠.
그런데 그냥 액션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OTL
'카일 원정대'라는 표현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다이나모님을 각본에 참여시키고 싶어질 정도네요.
이 양반들 정신줄 놓고 영화를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게 돈 많이 들여 CG로 떡칠을 한 액션 영화지, 무슨 터미네이터란 말입니까! T.T
돈만 많이 쥐어준다고 좋은 영화가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건 이미 진리지만, 하필 터미네이터의 새 영화로 그걸 또 한 번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었지 말입니다.
한 20% 모자라지만
나름 재미있게는 봤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란 이름 붙인거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수가 없어요 ㅜㅜ
트랙백 걸고 갈께요 ^_^
확실히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군요.
"I'll be back"을 존 코너가 하고, 막상 돌아오는 건 마커스 코너 였으면 좋았을 것 같더랍니다.
어찌되었건 지금 개봉된 버젼보다는 나았겠지요.
안녕하세요. 댓글은 처음 달아보네요.
닥터 실버맨 박사는 사라코너 연대기에서 죽는답니다.
사라코너 연대기에 터미네이터에 관련된 의문의 살인이 계속 일어나자
담당계 FBI가 사라코너에 대해 계속 조사 중 예전 사라코너의 정신과
담당 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사실 이 FBI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터미네이터의 존재를 믿고 있었습니다)
재차 터미네이터의 증거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심정에 산 속 깊이 숨어서
심판의 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실버맨의 숙소를 찾아가지만 이미 실버맨 박사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고
얼마되지 않아 죽습니다.
제 글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ㅎㅎ
아. 이런 꿀댓글을 이제사 봤습니다.
완소남 실버맨이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OTL
터미네이터가 재미있었던 요소중 하나로 이러한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공포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공포를 시각화해놓으니 싱숭맹숭한 결과가 나온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수도..
전 2편의 사라코너의 악몽에서 나오는 놀이터가 파괴되는 신이 어떠한 액션신보다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장면은 정말 제대로죠. 1편이 전체적으로 호러 장르의 공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의 명맥을 잇는 2편의 유일한 호러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일 귀신이 나오는 것도 호러라면 호러겠지만..)